난니 모렌티 | 4월 | 1997

영화는 난니 모레티 자신이 직접 나서는, 픽션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첫 장면에서, 난니 모레티와 어머니가 베를루스코니의 당선을 TV로 지켜보는 것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그는 분노하고, 프랑스 기자와 밥을 먹으면서 ‘파시스트가 집권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을 듣고, 고뇌한다. 그는 원래 50년대 트로츠키주의자 요리사를 주제로 한 뮤지컬 영화를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촬영 첫날, 그는 도저히 영화를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프로젝트 자체를 엎어버린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겠다, 는 사명감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 실비아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몇달 후면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반부터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영화는 난니 모레티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첫번째로 다큐멘터리(와 이탈리아 정치)에 대한 태도, 두번째로 아이에 대한 태도. 그는 어느 한쪽에 긍정적이고, 다른 한쪽에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한 면을 보여줄 것이다. 혹은 둘 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혹은 모두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다. 그는 영화가 진행되며 점점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의 정치에 진저리를 치기 시작한다. 베를루스코니와 다른 정치인들이 나와 TV 토론을 벌이는 장면에서 그는 무능한 야당 정치인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매체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쳐간다. 아이(아들)이 태어나기 전의 그의 태도는 그의 감정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카메라가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태도가 있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난니 모레티라는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이며(픽션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카메라는 그 사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보편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거의 대부분 철저하게 통제되어 놓인다. 즉 거의 모든 장면에서 카메라는 미리 그 장소에 가서 연기하는 인물들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 예외는 그가 수상 집회를 촬영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찾아가는 장면이다. 두 대의 카메라가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배 밖에서 배를 찍는 카메라. 또 하나는 배 안에서 (원래 의도했던 대로) 집회를 촬영하기 위해 놓여졌던 카메라. 난니 모레티가 촬영진과 언제나 그랬듯 티격태격하는 동안, 배 바깥의 카메라는 그들을 찍는다. 그러니까 두 번째 카메라는 화면에 고스란히 잡힌다. 그리고 유람선이 그들 앞을 지나간다. 쇼트가 바뀌고, 카메라는 유람선을 찍는다. 난니 모레티는 미처 비키지 못하고 화면을 반쯤 가린다. 이 상황에서 카메라에 대한 난니 모레티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카메라는 이 현실과 가상,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에 자리잡은 이야기 속에서 방관자의 역할을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 이르러, 카메라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며 항복한다.

혹은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신문과 잡지에 관련된 순간은 네 번이다. 가판대에서 잡지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장면, 스크랩한 기사를 이어붙여서 하나의 거대한 신문으로 만드는 장면, 아이와 (찢어지고 있는) 잡지 더미 속에서 뒹굴며 노는 장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며 모든 자료를 흩뿌리는 장면. 물론 지속적으로 TV와 (그러므로)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만들고자 하는 다큐멘터리는 (그가 영화 속에서 언급하듯) 좌파와 우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요컨대 입체적인 관점의 것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라는 단일 창구의 미디어보다는 신문 등의 종이 매체가 그가 원하는 태도에 더 가까울 것이고, 이 네 개의 장면은 그의 시도와 실패의 흐름을 요약한다. 여기에서 실패란 비단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현실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어떠한 국가에서도, 난니 모레티가 원했던 “좌파와 우파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정치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혹은 그 국가의 모든 신문과 잡지를 늘어놓았을 때, 그 파편들을 단 하나의 지면으로 엮어내는 것이 불가능할까? 아마도 세부적인 서사는 다를지라도, 혹은 이탈리아처럼 우울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단지 그가 줄자를 들고 길이를 셈할 때, 그 남은 시간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사적인 에세이로 시작했던 이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얻어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다시 뮤지컬 영화로 돌아온다. 카메라는 요리사들의 군무를 찍어내면서, 리듬에 맞추어 배우들과 함께 몸을 흔드는 스탭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앞의 시퀀스 그대로 어릴 적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난니 모레티를 보여준다. 이 모습은 그가 도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다른 하나는 포스터의 한 버전에 나온, 눈과 입을 가리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불완전하다). 그러니까 카메라 앞과 카메라 뒤의 모습이 일치하는 순간. 이 장면은 가장 첫 장면과 맞닿으며 울림을 만들어낸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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