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 동경의 황혼 | 1957

처음 두 씬에서, 거리와 술집을 담아내고 있는 카메라는 불필요하게 낮은 높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아버지인 슈키치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간다. 슈키치는 오래 전 아내가 도망갔으며, 둘째 딸 아키코와 살고 있다. 그의 집에는, 없어야 할 다카코가 남편과 별거하기 위해 돌아와 있다. 아키코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밴다. 마침 사라진 전 아내 기쿠코가 도쿄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그러니까 영화는 없어야 하는 인물들이 그들 – 슈키치, 다카코, 아키코 – 의 세계에 갑자기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다카코, 아키코의 아기, 그리고 기쿠코. 이 인물들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들을 사라지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영화가 마주한 질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아마도 영화에서 모범답안으로 제시한 것은 그저 ‘기다림’ 혹은 ‘순응’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즈 야스지로의 많은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대답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저 시간을 보내며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면 갈등과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된다. 영화는 이 가족의 갈등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간청한다. 슈키치의 방에서 쉴 새 없이 똑딱이던 초침 소리. 혹은 지나치게 불필요한 장면들을 전부 카메라에 담아내는, 그래서 때로는 영화가 이 잘라보내야 하는 시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태도.

그리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그 해법에 동의하고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슈키치는 가족들의 갈등 속에서도 가능한 뒤쪽에 서 있으려 한다. 혹은 그는 기쿠코에 대응하기보다는 그냥 잊어버리는 쪽을 택한다. 다카코는 기쿠코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고, 남편 간의 갈등을 그냥 ‘자신이 참고’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한다. 기쿠코는 자식들을 보러 도쿄에 돌아오지만, 결국 미련을 진하게 남겼을지언정 도쿄를 떠나버린다(그를 배웅하는 자리에는 아무 가족들도 오지 않는다). 오직 아키코 혼자만이, 그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에서 되돌아가기를 꿈꾼다.

영화가 시작하면, 아키코는 자신이 밴 아이를 ‘없애버리려’ 한다. 만약 그가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했다면, 최소한 영화는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어떠한 토론도 하지 않는다. 혹은 그 토론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이미 끝나있다.

아키코는 영화에서 유일한 반동세력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그는 그 속에서 고립된다. 아키코를 제외한 모든 인물은 그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끌어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자신의 범위 내에서 매우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아키코의 가족은 기쿠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인들은 아이를 밴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낙태 사실은 모른다). 그의 사정을 유일하게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영화와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영화는 다 알면서도 아키코의 방황을 매우 꼼꼼하게 찍어서 ‘전시한다’. 그리고 더 어쩔 수 없게 되자 그를 전차로 치어 영화에서 퇴장시킨다. 아키코의 마지막 대사: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이 대사는 그의 죽음이 영화에서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동경의 황혼]이 가장 잔인한 부분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의 ‘불청객’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키코의 아기도, 기쿠코도, 다카코도 슈키치의 세계에서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아키코도 그 불청객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제 세계는 일상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가장 유명한 스틸샷, 아키코가 혼자 앉아 앞을 바라보는 이 순간은 마주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럽다.

아마 우연이겠지만,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은 오즈 야스지로가 흑백 필름으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