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 세벌식과 두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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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Planck 키보드에 꽂혀서 이리저리 구매를 고민하던 중에 발생했다. Planck 키보드는 오쏘리니얼 키보드, 그러니까 키보드가 수직과 수평으로만 배치되어 인체공학적으로 움직임이 적다는 컨셉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해피해킹 키보드보다도 더 극단적인 미니멀한 배열인 셈. 이에 대해서 굳이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단 4열로 이루어진 이 키보드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문득 알게 된 사실: 이 키보드는 세벌식 사용자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왜냐하면 숫자열이 없기 때문이다.

세벌식 키보드는 초성/중성/종성을 구분하므로, 숫자열까지 키보드 배열을 나누어 쓴다. 문제는, Planck 또는 극단적으로 키 숫자가 작은 40% 배열은 숫자열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알파벳을 입력하는 데에는 쿼티 영역만으로도 충분하므로, 굳이 숫자열을 전면에 내놓을 필요는 없다12. 두벌식 입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쿼티 영역의 배치를 대체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벌식, 숫자열까지 키를 꽉꽉 배치해 놓은 경우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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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벌식이 왜 좋은 것일까? 질문을 고쳐서 다시 쓰자: 왜 세벌식은 2018년에 좋은 것일까? 우리는 세벌식을 쓰는 데에 대한 이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사실상 기술적인 부분에서 세벌식이 주장하는 전통적인 이점은, 거의 전부 타자기를 사용해야 할 때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두벌식 혹은 네벌식 타자기의 단점은 세벌식과 달리 초성과 종성을 타자기가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의 시대다. 굳이 사람이 초성/종성의 구분을 일일이 구분해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만든 컴퓨터 아닌가.

물론 몇가지 난점은 있다. 첫번째는 소위 ‘도깨비불 현상’, 그러니까 글자의 모양이 현재까지 타이핑한 자모에 따라서 계속 바뀌면서 흉해지는 현상인데, 이는 미적인 문제일 뿐이지, 기술적으로 느려진다던가 하는 문제점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된 지 오래다3. 혹은 세벌식이 초성/중성/종성 순서로 입력하는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오타를 방지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IME의 문제다. 예컨대 윈도우 기본 IME는 ‘ㅁㅜㄴ’은 ‘문’으로 인식하지만 ‘ㅜㅁㄴ’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나 Emacs의 자체 IME는 이 또한 ‘문’으로 받아들인다. ‘ㅜㅁ’을 ‘무’로 인식하고, 그 다음 ‘ㄴ’은 받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45. 즉 이는 소프트웨어 문제다.

리듬감이 두벌식보다 더 좋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세벌식의 리듬감이라는 것도 이상하다. 세벌식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초성(오른손)-중성(왼손 앞부분)-종성(왼손 끝부분) 순서대로 문자를 입력하기 때문에 매우 리듬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두벌식의, 초성(왼손)-중성(오른손)-종성(왼손)의 리듬감은 리듬감이 아닌 건가? 혹은 이러한 주장은, 모든 한글 입력이 세 개의 키 스트로크로만 가능하다는 가정에서 나온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리고 다시 한번, 이러한 주장은 타자기 시대의 환경을 가정하고 나왔을 확률이 높다. 키보드로만 입력한다면 이러한 리듬감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나, 결국 우리들은 마우스를 키보드와 함께 사용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오른쪽에 마우스를 놓는다. 왼손에 많은 입력 비중이 쏠리는 두벌식은, 그러나 오른손으로 사용하는 마우스에 의해 동선의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춘다. 세벌식의 경우에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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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개인적으로는 세벌식에 대한 호의는 어느 정도 감성적인 면이 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은 세벌식의 기술적 이점을 끊임없이 칭송하지만, 두벌식이 세벌식에 비해 손가락의 수직 방향의 동선이 현저히 짧다는 것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또 다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적은 이유는 타자기 시대에는 수직 방향으로의 이동이 세벌식이든 네벌식이든 두벌식이든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의 시대이고, 세벌식의 장점으로 꼽히는 많은 것들은 과거의 유산이다.

예전 논쟁들을 찾아보면 가장 웃긴 부분은 오토마타에 대한 것이다.

두벌식은 세벌식에 비해 오타가 많이 난다 -> 오토마타로 문제를 교정하면 된다 -> 오토마타 개발하기가 어렵다!

세벌식이라는 기술이, (그 이점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1. 물론 숫자 등의 문자는 조합을 통해 입력 가능하다. 
  2. 숫자열이 포함된 키보드는 Preonic이 있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리는데, 미니멀하지 않다라는 미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3. 다만 증분 검색 같은 부분에서 이로 인한 어려움은 발생할 수 있다(참고: [https://namu.wiki/w/%EB%8F%84%EA%B9%A8%EB%B9%84%EB%B6%88%20%ED%98%84%EC%83%81]. 그러나 이 또한 소프트웨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하나의 문자가 입력이 끝난 뒤에야 증분 검색을 실행하던가. 
  4. 여담이지만 Emacs의 한글 IME는 사용해 본 수많은 서드 파티 IME 중 최고의 퀄리티다. 만들어준 누군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5. 물론 ‘ㅁㄴㅜ’ 순서로 치면 ‘문’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두벌식 IME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손가락의 동선상 저런 오타는 나오지 않는다. 왼손을 연속으로 두 번 두드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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