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들

  1. 우선 이상한 질문: 키보드도 필기구라 말할 수 있을까? 쓴다라는, 행위가 내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개념적 형태로 만들어 외부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는 것에서 생각해 보면 단지 종이와 펜 뿐만 아니라 키보드도 훌륭한 하나의 필기구로써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도가 자신의 창작 행위를 ‘두드린다’라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자, 상당히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 미묘한 뉘앙스, 종이에 펜이나 연필로 서걱이며 글씨를 쓰는 행위와,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채워나가는 행위의 차이는 분명 무언가 다르다. 이 다름은 단지 그 행위를 떠올려 보았을 때에 느껴지는 차이 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키보드로 텍스트를 쓰는 것은 펜으로 쓰는 것보다 더 빠르고 즉각적인 필기가 가능하다. 생각의 속도가 다르고, 글로 나오기 전에 생각을 교정할 기회가 더 적다(물론 글을 쓰고 난 다음에 텍스트를 수정하고자 한다면 여전히 키보드는 펜보다 더 유리하다). 이 속도의 차이는 결국 글의 밀도의 차이를 가져온다. 나는 아직도 종이에 글을 쓸 때마다 약간의 중압감을 느낀다.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다 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과,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되돌아가기가 어렵다는 안타까움. 종이로 글을 쓸 때에는 다소 강제적으로 ‘사색하는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키보드로 글을 쓰버릇하면, 그러한 버릇을 떨쳐버리고 싶은 유혹에 점점 들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키보드로’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0-1. 그러나 어찌됐든 키보드는 기능적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필기구다. 그리고 사람들이 펜보다 키보드를 손에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단지 키보드의 기능적 측면 – 손가락을 놀려서 생각을 곧바로 화면에 옮기는 – 뿐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예컨대 기나긴 세월을 돌아 다시 유행을 타게 된 기계식 키보드가 있다. 기계식 키보드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호되기 시작한 계기는 사실 게이밍 기어에서 극강의 구분감을 갖고 있는 청축 키보드이긴 했지만, 그 전부터 소수의 사람들이 꾸준히 이 취미를 꺼트리지 않고 불씨를 살려온 것은 사실이다. 흔히 쓰이는 멤브레인이나 펜타그래프 키보드에 비해 확실히 더 나은 키감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 때문에1 오래된 키보드를 찾아 헤매이던 것이 예전 매니아였다면, 요새 주류는 기판과 스위치와 키캡과 하우징을 조합하려 마켓과 공제시장을 방황하는 것인 듯 하다. 다소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지만, 이것이 취미이니 어쩌겠는가. 이런 고가의 취미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사실 휴대성이다. 무게나 부피를 제외하더라도 기계식 키보드는 아직 무선이 별로 활성화되어있지 않고(만들라면 만들 수 있을텐데 왜 만들지 않는 것일까?) 미니배열 키보드는 아직 기능성이 불충분하다. 작년에야 Vortex Race 같은 쓸만한 제품이 나왔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은 많다.

  1. 두 종류의 키보드를 새로 샀다. 하나는 해피해킹 Type-S 일문판이고, 하나는 레오폴드의 FC660M PD다. 둘 다 일반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니배열 키보드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고, 가장 유명하다. 물론 해피해킹의 경우에는 약간의 이론이 있다. 왜냐면 일본어 배열은 한글 키보드의 표준인 ANSI 대신 ISO 배열을 쓰는데, 몇몇 키의 배치가 다르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또한 오른쪽 쉬프트를 적극적으로 쓰는 한국인 타이핑 습관 상 이는 쥐약에 가깝다. 결국 이 키보드는 Hasu 컨트롤러를 통해 자유로운 키매핑을 구현할 때에나 큰 의미를 갖고,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컨트롤 키를 캡스락과 바꿔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메리트를 갖는다. 새끼손가락의 위치가 아이들한 상태의 손가락 위치와 일직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Emacs를 사용할 때에는 그 메리트가 더 크다. 문제는 컨트롤 키와 조합한 단축키를 쓸 때에 새끼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의 상대적 위치가 오랜 기간동안 학습되어 왔는데, 그것이 뒤집혀 버린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적응의 문제다. 다른 키보드에 대해서도 이러한 배치를 도입할 수는 있다. FC660M PD는 딥스위치 설정을 바꿔서 컨트롤 키와 캡스락 키를 바꿀 수 있으며, 일반적인 키보드는 오토핫키 설정을 통해 강제로 리매핑하면 된다.

1-1.  타건을 해보았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소음 적축이었다. 청축의 구분감이 마음에 안 들 것임은 여러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의외로 갈축이 별로였다. 소리만 크고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해피해킹의 그 도각도각한 느낌이 기계식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물론 둘의 느낌은 미묘하게 다르다. 걸림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해피해킹 쪽은 다소 논리니어하다). 게다가 그렇게 산 키보드의 키감은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돈값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키감은 지금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 씽크패드의 키보드다. 나는 트랙포인트의 투박함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단지 키보드의 키감 하나만으로도 울트라나브 키보드의 키감은 최고다. 구형은 얼마나 조흥ㄹ지 잘 모르겠다. 결론이 매우 이상하게 흐르긴 했지만, 어찌됐든.

  1. 0의 질문을 확장해 보자. 키보드로 대표되는 디지털 필기구와 손으로 잡고 쓰는 아날로그 필기구2에 대해 앞에서 말한 행위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키보드는 평면적인 도구고, 펜이나 연필은 선형인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손가락 열개를 자판 위에서 독립적으로 놀리면서 글자를 입력하는 것과, 손가락을 한데 모아 펜을 잡고 한 글자 한글자 써내려가는 과정에서의 차이. 그러므로 키보드에서 타이핑 순간의 수직적인 느낌을 감성적인 영역으로 삼는다면, 펜이나 종이는 글씨를 써내려가는 수평적인 느낌을 중요시하게 된다.

2-1. 많은 종류의 필기구 – 연필, 볼펜, 만년필 – 등을 거쳐가면서 얻게 되는 결론은, 결국 모든 필기구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필요한 순간들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다(키보드의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쓴다기보다는 어떤 확고한 취향이 존재한다. 나는 업무별로 다른 키보드를 쓸 생각이 없다). 즉 완전무결한, 정점에 오른 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아날로그의 매력일 것이다3. 수많은 변수들의 조합으로 인해 생겨나는 분류할 수 없는 개성들.

2-2. 그동안 써본 여러 (아날로그) 필기구 중에 지금 정착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만년필: 나는 워터맨의 그 특유의 감촉을 좋아하지만, 현재 정착한 것은 두 자루의 라미다. 나는 그 디자인에 깊은 호감을 갖고 있다.
  • 볼펜: 제트스트림의 퀄리티는 최고이지만, 장기간 사용할 시에는 내 기준에 다소 미끌거리는 필기감을 갖고 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역시나 최고의 볼펜은 조터라는 생각이다. 하드웨어의 곡선과 무게와 심의 필기감 측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밸런스가 잘 잡혀 있다.
  • 홀더: 샤프와 연필 중간의 어떤, 그러니까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필기감이 가볍지 않은 위치에 있는 필기구. 일단은 스테들러의 마스 테크니코 (780c)를 쓰고 있다. 노크식이 아니라는 점을 빼고는 마음에 든다. 연필과 유사한 무게중심과 밸런스 잡힌 퀄리티도 그렇다. 이 리뷰에서처럼, 홀더펜 입분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노트는 여러 가지를 병행해서 쓴다. 메인은 무인양품 제품인데, 최근에 나오는 제품은 점점 종이 퀄리티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몰스킨 후진 거야 원래 유명하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미도리에서 나온 트래블러스 노트를 써보고 있다. 클레르퐁텐 노트도 써보고 싶다.

 


  1. 물론 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예컨대 기계식 키보드를 취미로 가진 많은 사람들은, 씽크패드 키보드가 가진 독특한 키감을 부정하지 않는다.  펜타그래프이고, 어디까지나 ‘노트북’ 범주 하에서 좋은 키보드로 불리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키보드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리니어를 제외하면, 기계식 키보드로 장시간 타이핑을 하게 되었을 때 오는 피로는 상당하다. 
  2. 키보드와 ‘디지털’ 필기구라는 용어가 완전하게 매칭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똑같이 키보드를 사용하는 타자기는 디지털인가 아날로그인가? 혹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플 펜슬이나 스타일러스 같은 도구는 분명하게 디지털 필기구이지만, 그 기록 방식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디지털 필기구와 아날로그 필기구를 가르는 기준은 기록되는 정보가 디지털 형식인가 아날로그 형식인가에 따라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정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3.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이야기는 펜에만 해당한다. 종이의 경우에는, 그저 좋은 종이와 나쁜 종이가 있을 뿐이다. 종이는 필기구를 가리나, 그것은 우열관계에 있다. 만년필로 쓰기 좋은 종이는 볼펜이나 연필을 써도 좋은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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