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C20
곡성
한글제목 곡성
곡성.jpg
단편 아니오
감독 나홍진
배우 곽도원, 천우희, 황정민, 김환희, 쿠니무라 준
국가 대한민국
연도 2016
태그 맥거핀,무기력함,죄책감

단평

백업

날짜 2016-05-13
평점 5 / 5


나홍진의 곡성을 둘러싼 현상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스포일러"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란 감독인 나홍진 그 자신도 포함합니다. 나홍진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모호한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려 애씁니다. 이러한 행동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자세로서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독의 설명 또한 영화를 둘러싼 하나의 해석일 뿐이며, 그 해석을 깊이 참고하긴 해야 하지만, 주눅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기괴하고 모호한 영화를 둘러싸고 수많은 사람이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곡성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그리고 조만간 볼 계획에 있었던 사람들은) 수없이 쏟아지는 스포일러의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눈에 밟히는 대로 몇 개를 읽어본바, 그들의 해석 중 적지 않은 수는 상상력의 날개를 과도하게 펼친 나머지 헛짚은 논리를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푸코의 진자에서 우스꽝스러운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모습, 이라고 빗대면 너무 나아간 것일 텝니다.

나홍진은 어느 인터뷰에서, "왜 곡성은 오컬트 영화인가"란 물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이 영화 장르를 오컬트로 결정한 순간은 다음과 같다. 문득 오컬트는 왜 유행을 다시 타지 못하고 고꾸라질까란 생각이 들었고, 카톨릭을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영화들에서 인간들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시안이자 한국인 그리고 카톨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이 장르가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란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엑소시스트가 흥행했을 때 사회 분위기를 알아봤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적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이 장르가 살아날 수도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

실제로 곡성은 한국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입니다. 시골 마을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공권력은 그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엉뚱한 얘기만 하고, 결국 주인공은 딸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요컨대 도입부만 보면 이 영화는 지극히 "한국적인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등장했던 한국적 영화 중 곡성은 다른 맥락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 동안 성공한 한국 영화들의 목록을 꼽아보면 명량, 국제시장, 베테랑, 내부자들, 히말라야, 검사외전 같은 작품들이 그 목록에 올라갈 것입니다. 이 영화들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한 다른 한국 영화들이 어떤 롤모델로 삼고 따라가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이 그려내는 "한국"은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을 다루지만, 그 태도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관객이 보고 있는 풍경이 왜 한국적인가"를 강박적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혹은, 많은 비평이 그러한 영화들을 앞에 두고 그 풍경의 정합성에 대해 분석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국제시장에서 논란이 된 부분은 영화에 나타나는 주인공과 한국 현대사의 풍경이 과연 올바른 관점에서 그려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자들에서 영화는 대한민국 상층부의 더러운 면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 관객의 분노를 이끌었습니다. 곡성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합니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마을의 상황, 그러니까 윗선이 잘못된 결론으로 수사를 무마하려 하고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에 집착하고 공권력은 전혀 작동하지 않으며 외지인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거부감을 보이는 풍경들은 다른 영화에 비해 굉장히 얕게 묘사되어 지나갑니다. 다른 영화였다면 이 부조리함을 꼼꼼히 보여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곡성은 그냥 쿨하게 넘어갑니다. 원래 이곳은 이런 곳이다. 놀랍게도 관객들 또한 이 "헬조선"스러운 설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엑소시스트가 흥행했을 때 사회 분위기를 알아봤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적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이 장르가 살아날 수도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란 감독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곡성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공간에 201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다시 말해, 영화 속 시공간이 "당연히 한국적"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도 당연한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곡성을 본 관객은 300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어떤 이유에서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취향이라는 측면에서의 아쉬움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본 다음, 이 새로운 질문을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혹은 필요합니다.

블로그

곡성, 나홍진, 2015: 한국 영화의 새로운 키워드에 대해

곡성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몇 가지 아쉬움 중 하나는, '나홍진 감독이 너무 많은 말을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다. 곡성은 상업영화, 혹은 이 영화가 위치한 장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단 하나의 공인된 해석"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혼란을 줄이는 조치는 필요해 보인다. 단 이 작업은 가능한 영화 내부적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딜레마다. 친절하되 다소 맥없는 영화가 될 것인가, 타이트하나 이해하기 난감한 영화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감독의 "지침"은 말그대로 영화를 보고 자신의 해석이 타당한지 여부(맞고 틀리고가 아니라)를 확인하는 일종의 가이드 정도의 역할로 충분하다. 나의 경우 놓친 장면이 몇 있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감독의 말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나홍진의 발언 요약본(정확히는 2016년 5월 10일 이동진과의 공개대담 녹취 요약본)을 읽다가 중 눈에 띄었던 대목은, "왜 곡성이 오컬트 영화가 되었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확실히, 이 기괴한 영화는 일반적인 오컬트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반적인 "한국식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일 여지가 있다. 나홍진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이 영화 장르를 오컬트로 결정한 순간은 다음과 같다. 문득 오컬트는 왜 유행을 다시 타지 못하고 고꾸라질까란 생각이 들었고, 카톨릭을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영화들에서 인간들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시안이자 한국인 그리고 카톨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이 장르가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란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엑소시스트가 흥행했을 때 사회 분위기를 알아봤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적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이 장르가 살아날 수도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 이 글은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아래에는 두 번의 줄가름이 있다. 굳이 줄을 가른 이유는, 이 글이 스포일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어떤 영화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스포일러가 필수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그 다음 줄가름에서는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려 했으나, 민감하다면 읽어서는 안된다. 결국 근본적으로 이 글은 영화를 한번 본 사람을 위한 것이다.)



결국 거칠게 말해 곡성은 아버지가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요약만 떼어놓고 보면 기존의 많은 영화들과 유사한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테이큰 시리즈도 "아버지가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혹은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더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그런데 이 요약에서는 몇 가지 세부적인 질문이 (일부러) 누락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들은 난감해진다.

첫번째: 영화가 시작되면 종구가 살인 현장으로 미적미적 향한다(이 장면을 포함해 초반부에 영화는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을 유독 강조한다). 그 곳에 펼쳐진 풍경은 괴기하기 짝이 없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은 "누가 왜" 이들을 죽였을까, 일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그러니까 경찰서 안에서 종구와 성복이 외지인에 대한 뜬소문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수사팀이 결론내린 "독버섯에 의한 정신착란"을 언급한다. 물론 둘 다 그 결론을 믿지 않는다. 혹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한다. 보통 한국영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클리셰는, "공권력의 헛발질" 내지는 부조리로 인해 별거 아닌 갈등이 확대되어 파국에 이르는 진행이다. 그런데 곡성에서 이 "독버섯"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소위 "맥거핀" 수준도 아니다. 그냥 잊혀져 버린다. 경찰서 장면 이후 독버섯에 대한 언급은 정말 간간히 나오며, 등장인물과 영화와 관객 모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곡성은 아버지"가" 딸을 구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만" 딸을 구하려는 이야기다. 원래같았으면 종구를 어떤 식으로든 방해했어야 할 공권력은 "독버섯"으로 상징되듯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사라진다. 이로써 사적 구제와 공적 시스템 사이의 갈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된다. 종구는 경찰로써 영화에 등장하지만, 그가 플롯 위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그가 경찰이라는 설정과 거의 상관이 없다. 예컨대 그가 약국 주인 같은 평범한 이였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두번째: 종구가 홀로 딸을 구하려 애쓰기 시작하면서 관객은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진다.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던졌던 질문: "누가 왜 이들을 죽였을까"란 물음이 이제 필요없게 된 것이다. 종구가 만나고 다닌 사람들 - 정육점 주인, 건강원 주인 등 -은 외지인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시한다. 종구 일행은 외지인을 만나고 오지만, 이상한 분위기 외에는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복이 그곳에서 딸의 신발을 들고 오고, 그날 밤 종구는 딸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지점에서 종구는 우리와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 "누가 왜 딸을 죽이려 할까". 이 질문은 우리의 질문과 맥락이 다르다. 영화를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말 그대로 진실 내지는 전말이 궁금하다. 그러나 종구에게는, 딸을 구해내기 위한 예비 질문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에게 질문의 대답이 진실한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영화가 처음 관성대로 종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헤쳐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종구가 점점 깊이 들어갈 수록, 그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은 점점 멀어진다.

세번째: 종구가 질문을 바꾼 다음에 보여준 행적은 이렇다: 1) 외지인의 집에 찾아가서 그를 협박한다; 2) 용한 무당이라는 일광을 불러서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굿판을 열지만, 그러나 괴로워하는 딸을 견디지 못하고 굿판을 뒤집어 버린다; 3) 마을 사람들을 모아 외지인을 죽이러 가지만 괴물이 된 춘배를 맞이해 혈투를 벌이고, 결국 외지인을 죽게 한다("죽인다"가 아님을 잊으면 안된다); 4) 딸이 살아남에 안도하지만 곧 딸이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이 부분부터 영화는 종구에게 온전히 주의를 돌리지 않고 산만해진다) 5) 집 앞에서 만난 무명이 예의 '베드로 닭 세번' 시퀀스를 제안한다(즉 이 장면은 기독교적 상징에 익숙하다면 이미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클리셰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관객의 질문과 종구의 질문이 만나는 순간은 4) 이후부터다. 종구가 무명(과 일광과 외지인)을 의심하듯, 우리도 무명(과 일광과 외지인)의 말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질문이 일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중간중간 종구로부터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구와 달리 (누군가에게) 굿판을 여는 외지인과, 외지인 주위를 떠돌던 무명과, 무명에게 굴복당하고 도망치던 일광을 "보았다". 그러니까 (소름끼치게도) 5) 지점에서 우리의 관심사와 종구의 관심사는 같은 질문을 두고 완전히 갈려버린다. "종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종구에게는 누가 악이든 딸이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딸의 생사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악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더군다나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부제와 (살아난 혹은 죽지 않은) 외지인이 만나는 장면을 병치함으로써 관객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종구가 무명의 손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딸의 생사여부가 아니라, 외지인과 무명 중 누가 악인지의 확인이다. 딸이 죽는다면 우리는 외지인을 의심했던 자신에 대해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딸이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명에 대한 미심쩍음을 버리지 않았던 자신의 혜안에 감탄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구를 위해 싸워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독버섯"을 읊어대던 공권력이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든.

네번째: 그러나 영화에서 주된 갈등이 일어나는 구도는 결국 종구와 무관하다. 결말에 이르면 일광-외지인-무명의 대립이 우리가 궁금해했던 전말이고, 종구는 단지 그 싸움 속에서 "등 터진 새우"에 불과하다. 이 구도는 차라리 (교묘하게 뒤튼) 슈퍼히어로물에 가깝다. 예컨대 어벤저스에서 뉴욕 시민 중 하나를 프레임 안에 넣고 따라간다면 곡성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징조, 징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이 재난이 자신에게 닥치는 것을 막기 위한 고군분투, 그러나 아무도 돕지 않는 외로움. 결국 "지구를 위한 전투" 끝에 뉴욕은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에게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곡성은 한국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고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영화다. 요컨대 "한국적인 영화"다. 그런데 그동안 등장했던 한국적 영화와 비교해서 곡성은 좀 다른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어떤 이정표 역할을 했던 많은 영화들은 영화 속 시공간이 "왜 한국적인가"를 강박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혹은, 많은 비평들이 그러한 영화들을 앞에 두고 그 풍경의 정합성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다. 곡성은 그러한 분석이 무의미한 영화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마을의 상황, 그러니까 윗선이 잘못된 결론으로 수사를 무마하려 하고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에 집착하고 외지인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거부감을 보이는 풍경들은 굉장히 얕게 묘사되어 지나간다(물론 몇몇, 그러니까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부조리함에 강박감을 가진다면 이 얕음이 매우 거슬릴 것이다. 나는 그 반응들이 좀 시시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곡성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공간에 201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다시 말해, 영화 속 시공간이 "당연히 한국적"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도 당연한가?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봉준호의 괴물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이 괴물이라는 분명한 적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 적의 정체를 흐리는 곡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 - 심지어 일부 평론가조차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면, 국가 혹은 어떤 종류의 거대한 시스템은 곡성이란 영화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진다. '무기력함'. 나는 이 영화를 요약하는 키워드를 고르라면 '무기력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구는 첫 번째 씬부터 '무기력하게' 현장에 등장해 이야기를 억지로 쫓아간다. 그러다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자, 이제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으므로 딸을 구해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파국을 맞이한다. 관객은 종구를 배신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려 시도하지만, 대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홍보문구대로 영화에게 무기력하게 "현혹된다". 영화 중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계속해서 일광에게 굿을 요청한다. 아마도 마을은 (이 상황이 계속되는 한) 무기력하게 몰살당할 것이다. 영화는 이 파멸을 바로잡을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물론 오컬트 혹은 공포영화에서 이러한 접근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홍진의 말대로, 그리고 관객의 반응대로 이 무기력함이 2016년 한국에 받아들여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글을 작성하는 현재 나흘만에 160만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둘러싼 여러 정황을 고려한다 할 지라도 이 숫자는 분명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년간 등장한 "성공한 한국 영화"(혹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한국 사회에 대한 계몽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관객에게 어떤 식의 깨우침 혹은 훈계를, 영화 속 풍경을 통해, 혹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곡성은 그 깨우침을 배제하면서도 관객에게 "한국적 풍경"을 제시하는 영화다. 그동안의 한국 영화가 불편했던 사람들은(아마도 그들 중 상당수는 이 "깨우침"의 과잉에 불편했을 것이다) 이 대안의 발견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뒤집어 말하면, 곡성은 모든 관객들에게 (그동안 한국영화가 안겨준 불편함과 다른 종류의)불편함을 안겨주는 영화다. 그 불편함은 (아마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내가 종구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불편함, 2) 내가 종구에 대해 (자의적으로) 관망자 위치에 서 있다는 죄책감. 그런데 1)과 2)는 물고 물리는 관계다. 1)이 불편한 이유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내가 2)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섬뜩한 사실은, 이 영화가 다른 영화를 비토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는 것이다.

2016. 5. 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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