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C20
옥자
한글제목 옥자
Okja.jpg
단편 아니오
감독 봉준호
배우 틸다 스윈턴, 폴 데이노, 안서현
국가 미국
연도 2017
태그 모험,관점

감상

날짜 2017-07-08
평점 3.5 / 5
  • 영화는 결국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환경을 타겟으로 투자되었다. "만들어졌다"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영화에서 스크린이 아닌 매체를 전제하였다고 볼 만한 태도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봉준호는 (거부되었지만) 필름으로 이 영화를 찍기 원했고, 어디까지나 극장과 커다란 스크리닝 환경에 맞추어 찍혀졌다. "미드"로 대표되는, TV와 스크린의 타협점을 잡은 구도도 아닌, 오히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모방한 프레이밍으로 보여진다.
  •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 "넷플릭스라는 매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넷플릭스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환경에 영상을 송출하는 것을 전제한다. 즉 4인치짜리 스마트폰에서 120인치짜리 프로젝션을, 360P의 저화질에서 4K의 고화질까지 다양한 환경을 커버한다. 물론 여기서 화면의 비율 같은 것은 무시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도 무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합당한가?
  • 영화에서 거의 모든 인물들은 극도로 평면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평면적"이란 행동과 성격의 평면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그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 미자는 오로지 옥자를 다시 산으로 데려오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 ALF는 동물학대를 막고 미란도 무리들을 고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미란도들은 자기 회사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미자의 할아버지는 그저 무탈한 삶을 유지하기만을 바란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은 각자 다른 이들과 공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수직적인 관계에 의해 제약된다. 미자는 불만을 갖고 미란도에 저항하지만 (힘이 없으므로) 번번히 그들이 하자는 데로 하기만 한다. ALF는 (자신보다 약한) 미자와 옥자는 도구적으로 이용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미란도에는 저항하지 못한다. 뉴욕 퍼레이드 장면에서 보이는 그들의 무기력함은 - 단순히 물리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전의 어리숙함에 대하여 - 저항이 아닌 굴복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들은 각자가 다른 평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평면 위에서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끊임없는 대치와 충돌이 끝나기 위해서는 이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넘어선다"라는 용어는 그 행동 자체가 평면이 아닌 입체 공간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결국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평면성을 잃고 입체성을 보여주어야,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옥자를 - 초반 산골 장면에서 영화는 이미 옥자가 인간에 준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 바라보는 관점들. 미자는 옥자를 동반자 또는 친구로 본다. ALF는 옥자를 동물로 본다. 루시 미란도는 옥자를 식량으로 본다. 이 관점들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낸시 미란도와 옥자의 대면에서, 미자는 비로소 그 자신의 관점을, 혹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함으로써 옥자를 구해낸다.
  • 위 문단의 확장 혹은 이상한 징후: 뉴욕에서 ALF가 옥자의 "강간" 장면을 상영할 때, 제이는 이미 미자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주문했었다. 오르페우스(와 수많은 구전)의 교훈: 미자는 뒤를 돌아보려는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물론 제이가 눈을 가리기는 하지만, 미자는 정말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여기까지도 이상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장면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관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앞의 씬에서, 옥자의 그 실제 장면을 "체험"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다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카메라도 시선을 살짝 흐리며 애써 그 전광판을 피한다. 혹은 영화는 관객에게 그 장면을 보여줄 마음이 없다. 그 장면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Clockoon (토론) 2017년 7월 20일 (목) 02:05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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