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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영화
기록일2015/09/06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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郊遊

단평

이 영화는 아이들을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결국 영화는 두 남매가 “세 여자”와 “세 아버지(혹은 하나의 이강생)“를 거쳐가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남매가, 아버지를 찾아 '소풍'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지만, 아버지가 그들의 삶에 들어오는 순간 불행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폐건물의 벽화처럼, '가부장'이라는 개념이 불가능함을 영화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평

많은 사람들이 차이밍량의 떠돌이 개를 보고 당혹스러워한다. 도무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극단적인 누군가는 이 영화에 “이야기가 없다”라고까지 선언한다. 나는 이러한 반응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이야기에 곧바로 올라타기 힘들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켠켠이 쌓아놓았다. 그러나, 외피를 걷어내어 일단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일직선으로 죽 이어지며, 관객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의 유명한 선언: “복잡한 것은 난해한 것보다 낫다”. 이 영화는 복잡하나 난해하지는 않다.

아마도 떠돌이 개를 보며 해메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이강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차이밍량에서 이 배우가 가지는 중량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일단 이강생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쫓아가면 십중팔구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야기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떠돌이 개란 제목에서 말하는 “떠돌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혹은 첫번째 장면에서 부제 또는 두번째 제목으로 등장하는 자막인 “소풍”의 주체가 누군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의 공간을 떠돌고, 소풍을 떠나는 인물은 명백히 아이들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강생도 아니고 여자(들)도 아니며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다.

아이들을 가운데에 놓고 그들을 따라가면, 결국 영화는 두 남매가 “세 여자”와 “세 아버지1)“를 거쳐가는 이야기다. 이 가설에 도달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강생이란 배우는 물리적으로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배우는 세 명의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는 세 여자에 대입되는 아버지 - 이강생이 각각 다른 사람이거나, 혹은 같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설사 이 사실을 발견했다 해도, 이야기 속에서 이강생은 (셋이 아닌) 두 인물로 등장한다. 게다가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둘 사이의 경계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한 명의 이강생이 세 여자를 거쳐 가는' 이야기로 읽는 것은 부적절하다. 반복하지만, 영화는 아이들을 중심에 놓아야 읽히는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하면 아이들은 “집”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다. 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 여자, 그리고 떠오르는 “소풍”이란 자막. 이 장면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없다. 혹은 전혀 별개의 장소에서 배를 타고 떠나려 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다. 장면이 바뀌면 아이들은 숲을 지나 하수구를 탐험한다.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것일까?

두 번째 여자는 마트에서 일한다. 그는 아이들/아버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아버지는 신축 아파트를 홍보하는 피켓을 드는 일을 한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낮을 보낸다. 두 번째 여자는 그런 아이들을 돌봐준다. 밤이 되면 아이들과 아버지는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사는 곳은 매우 허름한 어느 폐건물이다. 이 허름한 삶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는 낮에 아이들을 마트로 보내고 일한다. 한편, 밤이 되면 여자는 “떠돌이 개”를 돌보며 시간을 보낸다. 일상이 반복된다.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밤마다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점점 일상에 힘겨움을 느낀다. 어느 비 오는 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배를 태우려 한다2). 마지막 순간 여자는 아이들을 찾아낸다. 여자의 부름에 아이들은 아버지를 버린다. 아버지는 절망한다.

세 번째 여자는 아마도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남자의 아내인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교류한다. 아내는 남편과 교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버지에 대해 소극적이다. 아이들이 잠에 들고, 남편은 아내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다시 폐건물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기회를 청한다. 오랜 고민과 갈등이 이어진다. 마지막 순간 여자는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남자는 결국 혼자 남겨진다.

세 명의 여자. 하나의 남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전체에서 아이들이 가장 행복한 지점은 아버지가 없는 첫 번째 여자와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잠을 청하고 있다. 오직, 아버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순간 불행이 시작한다. 혹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아 '소풍'을 떠난 순간 이미 불행은 예정되어 있다. 마지막 장면, 아버지가 버려지며 소풍은 끝이 난다. 언젠가 아이들은 다시 아버지를 찾아 또 다시 소풍을 떠날 것이다. 정확히는 떠나야 한다. 왜냐면 아버지가 그들에게 돌아와야 '가정'이라는 시스템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들에게 돌아오는 순간 '가정'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지독한 모순. 폐건물 벽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풍경.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아버지와 여자(들)는 그 벽화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존재하지 않는 풍경. 그러니까 '가부장'의 불가능성을 영화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링크


Backlinks


1)
아버지란 용어를 쓴 것은 아이들이 이강생을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 내내 그가 정말 남매의 아버지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2)
배를 타고 떠나는 행위를, 일종의 자살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한 가설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을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