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4원소 - 물/불/공기/나무 - 가 모여 사는 도시에 이민온 불 가족의 이야기, 구체적으로 그 가족의 딸이 겪는 갈등을 소재로 한다. 불 가족이 이민을 왔을 때 정황상 나머지 3원소는 이미 정착하여 교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불의 특성상 나머지 원소 - 특히 물과 나무 - 와는 파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작중에서 필연적으로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은 결국 다음 두가지다: 1) 이미 여러번 구현된 이민자 2세의 서사(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하더라도 이 구도를 벗어난 해석은 불가능하다)가 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반복될 것인가? 2) 불과 다른 원소의 (물리적으로 자명한) 속성 차이를 영화는 어떻게 극복하여 원하는 결론 - 원소간의 화합 - 을 얻어낼 것인가?
영화는 다소 안전한 전략을 취한다. 불 가족의 딸인 앰버는 파이어타운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혹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을 밖으로 나가는 불은 앰버(와 앰버를 미행한 어머니) 뿐이다. 영화는 파이어타운을 일종의 개방된 듯 속이지만 폐쇄된 성으로 만들어놓고, 행여나 누군가 그 공간을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물로 가득찬 도시를 만들어 놓는다. 혹은 4가지 원소 중에 흙이 불과 친하지 않는 이유는 영화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예컨대 앰버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유리는 결국 모래 또는 흙을 그 원료로 한다. 왜 흙과 불은 도시에서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영화에서 흙은 항상 나무와 꽃을 피워 불에게 건내는 것일까? 영화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결국 그 이유는 엘리멘탈 시티를 장악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기만을 통해 물로 가득 채워진 도시에서 영화는 불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제거한다. 둑으로 막아놓은 수로에 물이 흐르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예정된 폐허 속에서 영화는 끝내 물을 파이어플레이스에 뿜어버리고, 앰버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부유한 물인 웨이드와 마주함을 당한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를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이 사단이 벌어진 이유는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앰버가 화를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듣지 못할 사적인 공간에서 아무도 모르게 개인적인 감정을 발산한 것이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당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외부의 누군가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당신은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영화와 관객이 당신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적절한 타이밍에 수도관을 통해 웨이드를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구제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우리가 보기에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꺼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뒤는 익숙한 전개가 이어진다. 앰버는 고군분투하고, 웨이드 가족은 앰버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앰버의 가족들은 앰버를 바깥 세상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고, 앰버는 갈등하고, 다른 불들은 파이어타운 밖으로 (명백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 결과(클라이막스 시퀀스에서 수로와 파이어타운을 담은 컷들의 배치는 이들이 강한 인과관계를 가졌음을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파이어타운은 물에 ‘씻긴다’. 웨이드는, 다시 한번 의도된 고립 속에서 앰버를 구해주고 희생하며, 그러나 (해피엔딩을 위해) 부활하여 앰버를 데리고 자신의 세계로 그를 끌여들인다. 앰버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배를 타고 유리회사로 떠난다. 요컨대 영화는 불을 최대한 비참하게 만든 다음 희망의 불씨를 주어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기만한다. 물 속에 잠겨 보지 못한 꽃을 보기 위해 앰버는 웨이드와 게일의 도움을 받아(이 멤버에 훍이 당연하다는 듯 빠져 있는 점은 이상하다) 물 속을 잠수하여 꽃을 피운다. 앰버의 운명도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 물과 공기와 흙은 불이 없어도 셋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만, 불이 그 세계 가운데 들어가려면 반드시 나머지 셋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불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모래를 녹여 유리를 만들고 그걸로 (둑을 막았던 것처럼) 원소와 원소를 가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모두가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Back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