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info | |
---|---|
status | Approved |
영화는 참치 등을 파는 트럭을 함께 타고 가는 카메라에서 시작한다(사실 정확히는 ‘옛날 옛적에…’라는 자막에서 출발한다. 이 자막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낯설지는 않은 출발이다. 혹은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 시점은 그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화의 시작은 방콕 혹은 태국의 어느 도시 도로를 라디오 소리와 함께 달리다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트럭일 수밖에 없다). 물건을 파는 트럭 안에서 카메라는 어떤 여자를 인터뷰한다. 여자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을 때, 카메라는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집어치운다’. 그리고 ‘현실이든 꾸며낸 이야기든’ 아무래도 좋으니 이야기를 하나 해보라고 한다. 여자는 당황하지만 곧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는 이렇게 실제와 허구 사이의 어느 경계에서 자리를 잡는다. 물론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근본적인 행동 양식이다. 우리는 영화가 허구 혹은 꾸며낸 이미지임을 알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이 이미지들이 실제로 발생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유도된다. 기술적인 완성도를 제외하면, 영화의 모든 시도들은 이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이다. ‘정오의 낯선 물체’는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간의 경계선에 서서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몇 가지 중요한 넘나듬의 순간: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휠체어에서 넘어지고 가족들과 벌이는 격한 설전의 순간, 카메라는 컷을 외치고 그들이 지금까지 연기한 것임을 알린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여기서 서로는 촬영진들도 포함한다) 대화하며 그들의 실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혹은 두 청각 장애인이 이야기를 수화로 전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이 실제 농인인지 그것을 연기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물론 또한 우리는 이 영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다. 영화는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인가? 영화가 무엇을 실제로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정확한 답은 영화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태국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그 내용을 영화로 담아낸 것, 이라는 설명을 영화는 자막을 통해 전달한다. 이 설명은 두 가지 질문을 낳는다. 첫째, 왜 영화는 끝날 때 즈음에야 그 사실을, ‘자막’이라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밝히는 것인가? 둘째, 영화는 왜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말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극영화의 형식에 가까운 촬영 방식을 택하려고 노력하는 것인가? 전자의 질문은 영화가 어떤 실험을 위한 목적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직접적으로 그 실험방법을, 그러나 끝에 알림으로써, 관객은 영화의 실험을 평가하는 심사인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후자의 질문은 조금 복잡하다. 어떤 정돈되지 않은, 연속적이나 구조적이지 않은 서사를 영화란 매체로 담아낸다면, 극영화의 방식은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혹은 극영화가 원 서사의 형식을 변형해야 하므로 결국 경계선을 넘어 어느 한 쪽에 기울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수집한 이야기의 형식을 보존하면서 극영화로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선택은 무엇일까? 영화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상영 시간동안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가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라디오, TV 리얼리티 쇼, 드라 마 등의 형식을 넘나든다. 그러므로 균형이 깨지는 순간, 극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마녀 호랑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영화는 중단된다. 혹은 여기서부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새롭게 실험을 시작한다(는 것을 예고한다).
Back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