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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음악
기록일2026/02/17
별점★★★☆☆

Bach/Goldberg Variation/임윤찬

음반은 임윤찬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카네기홀 실황을 녹음한 것이다(그 전후에도 그는 여러 번 골드베르크를 연주한 바 있다). 가장 두드러지게 들어오는 특징은 기존의 주류 연주와 달리 장식음을 꽤나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각 곡의 패시지가 반복될 때, 임윤찬은 전자에서 장식음을 억제하고, 후자에 투입하는 식으로 연주를 이끌어 나간다. 얼핏 들으면 모차르트가 연상될 정도의 표정의 변화. 특히 변주곡 7번에서 시작되는, 옥타브를 넘나드는 '색의 변형'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해석이 어떤 것인지 암시한다. 요컨대 (현대적) 골드베르크 해석의 전통의 시작인, 1955년 글렌 굴드가 통념을 무시하고 반복을 제거하며 극단적으로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 38분만에 연주를 끝내버렸던 순간을 2025년에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다. 글렌 굴드는 그렇게 연주한 이유를 '질질 끄는 것이 전체적인 통일성을 뺏어간다고 느꼈다'라고 설명했다1). 곡과 악보와 작곡가의 의도를 읽어내 충실히 재현하는 대신, 빈틈을 파고들어 연주자의 자의식을 한껏 발현시키는 굴드의 해석은 대중들에게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2026년 발매된 임윤찬의 음반 또한, 구현의 차이일 뿐 동일한 방식으로 곡을 연주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클래식) 연주자의 역할이 악보를 앞에 두고 창작자가 악보에 기록한 음악-기호를 소리로 만들어내는 역할이라면, 임윤찬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철저한 질서 속 최대한의 자유'란 명분으로 연주자가 명백히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소리를 내는 행위는 어느 시점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어떤 수준부터 우리는 그 행위를 '선을 넘었다'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의외로 음반에 비길 만한 시도로 떠오르는 것은, 존 바티스트가 2024년 발매한 베토벤 음반이다. 그는 베토벤의 악보를 앞에 놓고 연주하되, 흑인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자의식)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완전한 구조의 해체 수준은 아니되, 원곡에 대한 청자의 태도에 따라서는 '발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리듬과 화성을 불쑥 변조시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두 종류의 '선을 넘음'. 임윤찬의 음반이 보여준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존 바티스트의 해석에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혹은 두 해석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전선을 그으면,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존 바티스트의 음반에 대해서는 따로 메모를 남기겠지만) 나는 존 바티스트의 베토벤 음반에 담긴 소리가 베토벤의 음악이 아니라 존 바티스트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재생했을 때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 역시 바흐의 음악이 아니라 임윤찬의 음악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흐의 음악이다.


Backlinks


1)
굴드는 1981년 재연주에서는 55년의 해석을 부정하고, 느린 템포와 반복을 부활시킨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다. 그는 (역시나 '통일성'이란 명분으로) 일부 반복은 생략시켰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rviw/r202602170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저자 clock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