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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잘 알려져 있듯) 영화는 아우슈비츠 담장 옆에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사는 소장 로베르트 회스의 가족들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첫 번째 씬(나는 이것을 씬이라 부르고 싶다). 검게 암전된 화면에서 몽환적이나 불안한, 명확한 선율이 존재하지 않는 신스 사운드로 수십초간 전개되는 음악은, 앞으로 관객에게 나타날 세계에 대한 영화의 지침이다: 1) 지금부터 영화가 보여줄 세계와 만날 때는 시각보다 청각을 더 중요하게 마음에 두어야 한다. 혹은 우리가 눈을 감고 소리만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영화는 성립한다1). 2) 음악이 자아내는 앰비언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는 영화 속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알 수 없는 다른 층위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이 층위의 분리는 이후 영화가 일관되게 밀고 나가(려고 하)는 전략이다.
영화가 암전을 풀고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의 집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층위를 분리하려는 영화의 속셈은 명백해진다. 회스의 가족들이 물가에서 노는 씬은 특유의 쨍한 디지털 화면의 디테일이 극대화돼 눈이 시릴 정도이고, 그 다음 이어지는 회스의 단독 커트는 마치 AI로 만든 듯 부자연스러운 디포커싱을 투영한다. 회스의 집안에 촘촘히 배치된 카메라는2) 인물들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빈틈없이 쫓아간다. 즉 인물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혹은 찍고자 하는 커트는 전환된다. 이 시선을 관객이 가장 또렷이 느끼는 장면은 회스의 아내가 (직전 씬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명백히 수용소의 유태인에게서 노획한 것이 분명한) 모피코트를 방에서 입어보는 장면이다. 직사각 형태 방의 네 귀퉁이에 배치된 카메라는 초소형 카메라의 특성상 광각 렌즈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대칭적인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을 불균일하게 왜곡하여 화면에 담는다. 이는 오로지 기술적 제약으로 인한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어떤 의도를 갖고 이루어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카메라와 인물의 물리적 거리는, 따라서 관객과 인물의 거리는 통상적인 실내 씬에서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지만,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관객이 느끼는 인물과의 거리는 훨씬 멀어진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어쩔 수 없이 ’관찰예능‘이란 단어가 멤돌 수밖에 없다. 적어도 회스의 집을 둘러싸고 영화가 선택한 전략은 연예인들의 ’리얼 라이프‘를 시청자에게 설득하기 위한 관찰 예능의 접근법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감각적 거리를 멀리 띄워놓고, 그들의 행동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사건이 전개된다고 믿(고 싶어하)는 관객들/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3). 한발짝 더 나아가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예능과 시청자 간에는 두 가지 계약관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물론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와 가상을 현실이라고 믿겠다는 시청자의 계약이다. 그러나 이 만들어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방송의 제작진과 출연자는 시청자의 선언을 누군가에게, 대개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기로 합의됐던 이들에게 팔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들이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진정한 화면은 사실 이것이다. 이 두번째 계약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멀리 거리를 두었던 카메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혀야 한다. 이는 곧 그들이 구축한 세계를 무너뜨리는 균열로 작용한다. 제작자들도 그 필연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필연적 프로세스를 시작하지 않으면 세계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 주제에 대해 너무 멀리까지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관찰하기로 결정했을 때 다른 층위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결국 그 대상을 방해하고 붕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회스의 집과 분리된 아우슈비츠는 간접적인 방식 - 사운드와 담장과 불빛 - 으로 집 안에 끼어든다. 이 장치들은 영화속 세계가 현실의 세계와 더 유사하다는 믿음을 관객에게 강화시킨다. 혹은 우리가 회스의 집을 관찰하는 것과 달리 그 구성원들은 (구도상 그들이 관찰해야 하는) 아우슈비츠를 의식하지 않는/않으려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암전에서 우리가 받은 지침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속 세계는 우리가 설사 눈을 돌리더라도 관찰을 멈출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치 관찰예능의 간접광고와 유사하게 이 계약은 세계의 구도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두 번째 암전이 이루어진다. 회스의 집 정원에서 클로즈업한 붉은 꽃잎에서 번져나간 붉은 화면은 형식적으로 첫 번째 암전과 동일하다. 즉 화면 가득 단색의 레이어로 세계를 절단하고, 예의 첫 씬에서 삽입됐던 신스 음악을, 더 불안한 사운드스케이프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우리가 간주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첫 번째 암전과 동일하게) 어떤 층위의 단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붉은 암전이 풀리고 나면 무엇이 단절되고, 영화는 어떠한 층위로 내려가는가?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드디어 회스의 집 안의 사람들이 집 바깥의, 그들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닫힌 계 밖에 있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를 영화가 관객에게 암시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밤 가족들은 까닭없이 불안해한다. 회스는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말에게 감정을 토로하고 집무실에서 매춘부를 부른다. 아내는 부리는 이에게 격렬히 짜증을 낸다. 보모는 술에 취한 채 (잠자는 아내와 다른 방에서) 우는 아기를 방치한다4). 회스의 장모는 전날 밤 밖의 붉은 연기와 예의 그 ‘노이즈’를 듣고 다음날 말도 없이 집을 떠난다. 물론 이 서술은 어느 정도는 악의적인 것이다: 이들의 불안감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에서 왔다기 보다는, 회스가 아우슈비츠를 떠나게 됐다는 통보를 받은 가족들의, ‘홈’의 해체에 기인한 것이 더 크다5).
어떤 해석을 택하던, 두 번째 암전이 이루어진 뒤 관객은 더 이상 회스 가족들을 마냥 단순한 존재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두 가지 감정이 우리에게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악행이 미화되고 인간적인 고뇌로서 변호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내면에 최소한의 인간성이 포함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를 견뎌내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전자에서 출발하지만(그래서 관객과 세계와의 거리를 일부러 두려고 하지만) 붉은 암전 이후부터는 후자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기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관객을 관찰한다. 만일 어떤 실수를 통해 관객이 회스 가족의 인간성을 발견한다면, 마치 간접광고를 들킨 예능처럼 그 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영화를 보다가 우리가 당황하는 지점은, 회스가 아우슈비츠를 떠난 이후부터 회스의 집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회스가 아내와 통화할 때, 아내를 화면에 등장시키기 위한 쇼트를 제외하고는 회스의 집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회스는 그의 ‘홈’에 관심이 없으며, 전화로도 줄곧 유태인을 어떻게 아우슈비츠로 불러들일 것인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아우슈비츠로(그 곳에 있는 그의 집이 아니라!) 돌아갈 것인지에 관해 떠든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회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가 유대인에 관해 ‘일하는’ 모습들을 꼼꼼히 따라간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예의 그 ‘하강’ 씬에서 회스가 계단을 내려갈 때, 우리는 그 기묘한 화면 전환에 주목하지만(물론 이 전환에 대해 뒤에서 다룰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 계단을 다루는 카메라의 태도가 아우슈비츠의 집 복도에서 회스를 따라가며 그를 찍는 카메라의 태도와 유사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이 ‘전환’이, 영화로서는 가장 중요한 쇼트들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직전의 순간이 아우슈비츠의 집이나 다른 곳이 아니라 회스가 일하는 사무실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관찰하는 혹은 관찰을 강요받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으로부터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꾸며놓은 이상적인 집의 전선이 아니라, 그저 (가족보다도 유대인의 ‘절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회스의 삶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어진) 관객을 안도시키지만, 그 대신 기존의 통상적인 나치 소재 영화의 컨벤션으로 (일시적으로) 회귀한다.
‘전환’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시퀀스는 다음과 같다: 회스는 사무실 계단을 내려가다 헛구역질을 한다. 그 구역질은 두 층을 내려오면서 층마다 이루어진다. 두 번째 구역질 후 회스는 문득 몸을 일으켜 복도 양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계단을 다시 내려간다. 그러나 이 ‘바라봄’ - ‘내려감’ 사이에서 영화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청소하는 쇼트들을 끼워넣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구멍에서 시작해, 개관하기 전의 박물관 내부 이곳저곳을 청소하는 이 장면의 주된 목적은 당연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시퀀스가 끝나면 별도의 전환 없이 회스의 사무실로 돌아가고, 회스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며 암전된다. 세 번째 암전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이 ‘전환’은 다소 무리하더라도 사실상 영화가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도착지일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간접적으로밖에 보여주지 않았던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여전히 간접적으로, 그러나 가장 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한 시퀀스다. 이 서로 다른 시공간 상에 있는 두 씬 간에 암전이 없다는 점은(문구멍 쇼트는 현재 시퀀스의 일부이지, 장면 전환을 위해 끼워넣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이 두 장면을 동일한 층위에 놓고자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혹은 다소 무리해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회스는 복도 속의 어둠 속에서 실제로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보았거나 최소한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그는 귀결을 확인했음에도 그의 ‘회스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위해 스스로 계단을 내려가 암전된다. 그 암전을 통해 관객이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 돌아온 관객이, 신경을 곤두세웠던 감각을 진정시키며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돌아왔는가? 그런데 영화가 하강으로 끝났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암전을 거치며 층위를 계속 내려갔다면, 우리는 영화가 끝나도 처음 있었던 위치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껏 내려간 우리가 ‘돌아온’ 것은 맞는가?
영화는 극악무도한 회스와 그 가족들이 극악무도한 악인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정받을 모든 여지를 차단한다. 이 증명은, 회스 가족이 아우슈비츠와 자신을 분리하려는 시도들을 관객이 관찰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들은 (법률적 의미에서의) 선의가 아닌 악의로 그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 유토피아임을 증명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분리시킨 다른 공간이 디스토피아임을 확인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직전까지 영화가 해온 시도는, 그 분리된 공간을 시각적으로 차단하려는 회스의 전략을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을 개념적으로 붕괴시키고 고립시키는 작업이다. 눈을 감아도 성립하는 영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영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것들이 단지 개념이 아닌 실제임을 확인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눈을 뜨고 화면을 바라보도록, 그래서 언급했듯 영화 속 인물과 같은 층위에서 같은 것을 관찰하도록 강제당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장면이, 영화 속 다른 어느 쇼트들보다 극도로 청각적 경험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찍혀졌음을 상기해야 한다. 영화란 매체에서 청각은 공유될 수 없지만(혹은 회피할 수 있지만) 영화를 멈추지 않는 이상 시각은 공유와 회피를 피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같은 것을 보았고 같은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균열을 이기지 못하고 영화 속 세계에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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