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20::ARCHIVE

SEOUL_still under construction‍
archive:a2023060101
pageinfo
status
Need Revision

개브리엘 해밀턴 <프룬을 닫으며>

http://cwtcwt.egloos.com/m/6742140

cwt

2021.02.09

식당은 20년간 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내 레스토랑이 더 이상 필요할까요?

직원 30명 전부를 해고하기 전날 밤, 싸늘한 주검이 된 두 아이가 묻힌 곳에서 5피트 떨어진 곳을 파헤치는 꿈을 꿨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흙 사이를 비집고 나온 막내의 로열블루색 양말 발꿈치가 눈에 들어왔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지난 열흘간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이랬다 저랬다 했다. 열흘 내내 뉴스, 트위터, 내 친구들, 내 서버들에게 시달렸다. 이제는 각자 레스토랑을 이끄는 조타수가 되었지만 아직도 내게 조언을 구하는 동료 셰프와 매니저들의 문자가 물밀듯 쏟아졌다. 우리 운영 매니저는 정중하지만 초조하게 캐비어 같은 배달 서비스 플랫폼과 계약을 하자고 부탁했다. 심지어 아내 애슐리마저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과 조바심에 영업 마감을 저녁 9시로 앞당기고 근무시간을 줄이자고 나를 들볶았다.

관공서에서는 어떤 명확한 지침도 내놓지 않았고 — 공립학교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 난 이 열흘간 서로 모순되는 의견들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일순간 깨달음이 닥쳤다. 나는 모두를 해고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내 아내조차도. 맨해튼에 위치한 내 식당, 프룬은 3월 15일 오후 11시 59분에 문을 닫을 것이다. 처리해야 할 일들 중 감정 소모 없이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통장 잔고 정리였다. 판매세 납부용으로 예금 계좌에 따로 떼어둔 돈을 끌어오고 거래처 청구서를 미지급 상태로 두면 직원들의 마지막 주급만큼은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날 브런치 영업 후의 전 직원 회의에서 내 결정이 옳았음을 알았다. 몇 주 동안의 일일 매출 감소 추세를 눈으로 확인하자 — 토요일의 12,141달러에서 월요일의 4,188달러, 그리고 목요일의 2,093달러까지 — 낙하산 줄을 당기기로 결정한 데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 나뭇가지에 추락하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부주방장과 라인쿡은 페이스타임으로 참석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다이닝룸에 모였다. 나는 모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두들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실업급여를 신청하시길 권합니다. 여러분에겐 앞으로 1주치 주급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회의가 끝나자 잠시 모두 갈 곳 잃은 듯 혼란이 일었다. 소지품을 챙겨두어야 하나? 칼을 들고 영업 준비를 해야 하나? 남아서 술이나 마셔야 하나? 아직 마지막 저녁 영업이 남아 있었다. 애슐리, 나, 우리 제너럴매니저 안나, 그리고 소중한 라인쿡 제이크 이렇게 네 명이 몇 시간이 될지 모를 프룬에서의 마지막 근무를 시작했다. 직원 몇 명은 회식도 하고 매상도 올려줄 겸 남았다. 소문이 퍼지자 프룬의 졸업생들이 먹지도 못할 주문을 하기 위해 연락을 해왔다. 박사 과정 내내 프룬에서 서버로 일하고 이제는 앨라바마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된 로런 코이스는 이런 주문을 넣었다.

  • 다크 앤 스토미 두 잔
  • 앤초비를 곁들인 새우
  • 굴 튀김(오늘의 특선인 걸로 생각할게요)
  • 레오 스틴 쥬라식 슈냉 블랑 한 병
  • 홍어 지느러미
  • 트레비소 샐러드
  • 오리 기름으로 요리한 감자
  • 국물에 자작하게 끓인 콩 요리
  • 브레톤 버터 케이크
  • 블랙 커피 두 잔
  • + 50퍼센트 팁

애슐리는 그릴 스테이션과 차가운 애피타이저를 담당하는 동시에 바텐더와 주문 관리를 맡았다. 안나는 서빙을 하면서 손님을 맞고 전화를 받았다. 제이크는 화구 열 개를 혼자 돌렸다. 나는 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거리와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기를 치우다가 코이스의 주문 내용을 듣고 잠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식당을 하면서 ‘가족’이란 단어를 종종 입에 올리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날 매출은 1,144달러였다.

그날 저녁 직원들이 퇴근할 때, 아직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는 전혀 몰랐지만 서로 물리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걸 어색하게 의식하면서 멀찍이 서 손을 흔들며 아쉬움과 이 상황에 대한 황당함이 뒤섞인 인사를 나눴다. 바닥 청소를 하려고 마지막으로 유리 식기들을 치우던 차에 애슐리가 몸을 기울여 알렸다. “방금 발표했어, 드블라지오 시장. 셧다운이래. 자기가 다섯 시간 선수 쳤네.”

다음 날인 월요일, 애슐리는 직원들을 위한 생존용 식사 키트 30박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랜 라인쿡 생활로 습득한 요령으로 국물용 일회용기에 핸드폰을 넣어 스피커 삼고 지퍼백에 견과류, 쌀, 파스타를 소분하고 커리 페이스트 캔과 달걀을 나눠 넣었다. 호세 안드레스 셰프한테 이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보냈더니 바로 전화를 걸어 격려를 전했다. 우린 함께 이겨낼 거야! 한 그릇씩 세상을 먹여 살리는 거야!

애슐리는 마지막으로 도매처에 대량주문을 넣었다. 피넛버터, 캔 참치, 코코넛 밀크 등 우리 주문 기록에 한번도 오른 적 없는 품목들이었다. 우리 회계 담당 마리 엘레나 코라오 — 우린 20년 전 그녀의 첫 고객으로 만나 2016년 우리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사이가 되었다 — 는 목소리 한번 안 가다듬고 주문을 넣곤 지금은 문을 닫은 거래처로 트럭을 보냈다. 대금을 언제 지불할 수 있을지 요원하다는 걸 우리만큼이나 잘 알면서 말이다. 20년간 거래해온 가족 경영 정육점 ‘피노스 프라임 미트 마켓’의 레오는 우리가 어쩌려는지 떠보려는 게 아니라 당장 먹을거리를 대주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우리 여사님들, 집에서 어떤 고기가 필요하십니까?” 몇 천 달러는 되는 30일치 청구서가 아직 미지급 상태로 내 책상에 쌓여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굳게 닫힌 프랑스식 문 밖으로는 온종일 동네 단골들이 지나가며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알고 보니 갑자기 식당 문을 닫는 건 일주일 내내,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문자가 쏟아졌다. 격려 전화와 아쉬움이 담긴 예약 취소로 종일 전화벨이 울렸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소식을 미처 못 들은 것 같은 손님도 한 명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아 인사말을 마치기도 전에 “네네, 브런치 영업하세요?”라며 묻더니, “건강 유의하세요”라는 내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끊었다.

애슐리가 냉동고를 정리하고 냉장실의 신선식품들을 “오늘 드세요!” “이건 두고두고 드셔도 됩니다” 등의 카테고리로 나누는 데는 거의 사흘이 걸렸다. 미리 조리한 닭고기는 공기가 닿지 않도록 오리 기름에 재우고, 비트와 방울양배추를 피클로 담그고, 몇 리터는 되는 헤비크림을 버터로 만들었다.

다른 문제들은 신속히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은행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판매세와 주류 대금, 다가오는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니 이 재난을 살아남으려면 적정 규모의 마이너스 통장이 필요했다. 지난 20년간 매년 250만에서 300만 달러 정도가 통장에 들고났으니 대출 심사가 빨리 처리될 거라 기대했지만 공교롭게 작년에 주거래 은행을 바꿨다는 게 기억났다. 업계 동료들은 모두 나보고 중소기업부에 재난지원 대출을 신청하라고 조언했다. 많이는 필요 없고 2주에 5만 달러 정도면 되겠지 싶었다. 문의를 넣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20년간 내 보험설계를 담당한 켄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침착하고 전문적인 ‘당장 도울 방도가 없다’는 어투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업 중단은 보험 처리가 될 가능성이 낮다고 설명했다. 주변의 화재나 홍수로 인한 불가피한 영업 중단처럼 피해 청구 신청을 넣어보긴 하겠지만, 보험금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산재보험 납입액이 통장에서 6일 후 빠져나갈 예정이라는 보험사의 알림 메일을 받았다.

통장 잔고야 뻔하니 “빼갈 테면 빼가라지” 콧방귀를 뀌었다. 켄에게 전화하자 납입 유예 처리를 해주었다.

그제서야 3주간 솟구치던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버너 점화구를 확인하고 쓰레기를 내놨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애쓰는 걸 그만두고 쓸려가도록 몸을 맡겼다. 난 이곳에서 20년을 보냈다. 갓 졸업한 대학원생으로 시작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이혼과 재혼을 하고, 중간중간 장례식과 첫 데이트들을 치러냈다. 가게의 벽과 스위치, 수도꼭지는 내 손바닥처럼 훤했다. 애슐리와 내가 마침내 가게 셔터를 내리고 집으로 걸어갈 때는 밖이 컴컴해져 있었다.

프룬은 가족 같은 스태프와 애정 깊은 단골들로 북적대는 활기찬,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자그마한 식당이다. 난 프룬을 1999년에 열었다. 열네 개밖에 안 되는 테이블은 음식을 한입 먹으려고 와인잔을 내려놓다 옆 테이블에 실수로 놓을 정도로 촘촘하게 배치돼 있다. 그 덕에 많은 우정들이 생겨났다.

20년 전, 하루 종일 케이터링 일을 하고 돌아와선 거의 매일 밤을 꼬박 새워가며 메뉴를 쓰고 플레이팅 구상을 스케치하고 가게 벽을 문질러 닦고 문틀을 버터색으로 칠하던 때, 난 무슨 상상을 했던 걸까? 망한 프렌치 비스트로였던 이곳을 처음 보러 왔을 때, 자물쇠가 잠긴 허름한 문 뒤 바에는 끈적끈적한 페르노 술병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가고 있었고 바닥에는 쥐똥이 카페트처럼 깔려 있었다. 하지만 티셔츠를 입까지 끌어올리고 힘겹게 숨쉬면서 가게를 둘러보던 그때, 내 눈앞에는 매일 밤 이 매력적이고 이상한 공간에서 열릴 친밀한 저녁 파티들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난 머릿속에서 이미 초에 불을 붙이고 작은 유리 잼 병에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의욕 넘치는 셰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공격적으로 ‘컨셉추얼’하거나 ‘조형적인’ 음식도 아니고 프리랜서 케이터링을 나갈 때 만들던 룰라드나 간소화된 한입거리도 아닌, 집에서 하던 대로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다. 기름이 잘 먹은 나무 그릇에 손으로 찢은 양상추와 통째로 구운 송아지 가슴살을 담고, 식후에는 잘 익은 치즈를 내어야지.

당시만 해도 뉴욕은 지금처럼 뜻밖의 동네와 블록마다 말도 안 되게 작은 공간에 자리잡은 근사하고 야심찬 레스토랑들이 가득한 도시가 아니었다. <Eater>도, 인스타그램도, 힙한 브루클린 푸드 씬도 없었다. 프로페셔널한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맨해튼에 가야 했다.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아르마니 정장을 입은 ‘캡틴’이 이끄는 파인다이닝을 경험하고 싶다면 업타운으로, 나무를 휘어 만든 케인백 의자와 긴 흰색 앞치마를 두른 웨이터가 있는 북적북적한 미국식 술집에 가고 싶다면 다운타운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제대로 된 식당이라면 웨이터가 플란넬 셔츠를 입게 두거나 얼굴에 피어싱을 하고 목에 타투를 한 소믈리에를 고용하지 않았다. 이스트 빌리지에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식 다이너, 팔라펠 매점, 피자 가게, 허름한 술집과 채식 카페가 있었고, 국수를 먹을 만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모모푸쿠는 프룬이 연 지 5년 후에야 생겼다.

뉴욕의 다른 진지한 레스토랑들처럼 맛있고 흥미로운 음식을 제공하면서도 빈털터리 친구들과 이웃들 — 이스트 빌리지의 화가와 시인, 부치와 드랙퀸, 내가 세들어 사는 건물 6층의 색소폰 연주자, 122번 공립학교 옆에서 용감하게 나체로 행위예술을 하는 예술가들 — 이 주눅들지 않고 환대받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벌이가 라인쿡 수준이지만 입맛 역시 라인쿡 수준인 이들이 퇴근 후나 쉬는 날에 찾을 수 있는 식당을 꾸리고 싶었다. 그래도 그때까지 해온 프리랜서 일들 보다는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금 뉴욕 곳곳 수많은 작은 식당의 셰프들처럼, 나 역시 돈벌이나 사업 확장보다는 감각적이고 인간적인, 시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20년 동안 주7일을 보아왔으면서도 바텐더가 얼음을 채운 칵테일 셰이커에 쇠 뚜껑을 탁 닫고 마라카스처럼 흔들어댈 때마다 난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소금 친 피스타치오를 라크로 플람베할 때 나는 아니스 향이 다이닝룸 전체로 퍼져나갈 때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여쉰다. 9번 테이블의 4인조가 자기네들이 마지막 테이블인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우리가 계산서와 함께 놓아둔 다크 초콜릿과 와인의 여운을 즐기며 서로간의 대화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직원들과 조금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장으로서 모른 체하지만, 복도에서 우리 ‘애들’이 근무 준비를 하며 서로 안부를 묻고 포옹을 나누고 수다를 떨 때 조용한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첫 급여 지급날 꽤나 노골적으로 깨닫게 되는 건, 시적인 감상들과 별개로 이건 사업이란 점이다. 그 귀염둥이들의 생계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 말이다. 처음 프룬을 시작했을 때는 주6일 저녁 영업, 월요일에는 쉬었고 내 주급은 425달러로 책정했다. <뉴욕 타임스>에 무척 호의적인 리뷰가 실린 후부터 가게는 늘 만석이었다. 2000년에 저녁 영업을 하루 늘리자 부주방장을 풀타임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영업 전략이라기보다는 낭만적 이상으로 시작한 주말 브런치는 초기 투자자 여섯 명의 지분을 사들일 수 있게 해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8년, 나는 마흔 세 살이 되었고 드디어 내 식당 지분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학자금 대출 상환을 마쳤고 내 주급을 800달러로 올렸다. 몇 년 후, 평일 점심 영업을 추가한 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비즈니스 결정이었다. 직원들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싶었고, 끝내주는 버거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프룬은 일주일에 14회, 주7일 영업하는 직원 30명을 둔 식당이 되어 있었다. 급속도로 성장한 프룬의 첫 10년은 황홀하고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프룬은 달라지고, 작아졌다. 더 영업을 확장할 여지는 없는데 비용은 계속해서 오르기만 했다. 주마다 근근이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매출밖에 올리지 못했다. 종종 난 비영리 분야 종사자라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지난 몇 년간 그 농담은 음울하게도 진실에 가까워졌다. 식당 벽에 제임스 비어드 상이 4개 붙어 있고, 선반에는 PBS 방송 프로그램으로 받은 에미상과 6개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가 놓여 있음에도 지난여름, 53세의 나는 화가들이 입는 전신 작업복 차림으로 수도꼭지에 연결된 정원용 호스를 손에 든 채 주방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가스레인지와 영업용 냉장고 뒤에 표백제와 세제, 기름때 제거제를 들이부은 후 손이 닿지 않는 깊고 어두운 소테 스테이션에 물줄기를 쏘아 달걀 껍데기부터 홍합, 녹색 수세미, 육수 내는 뼈, 간보기 스푼, 케이크 테스트용 꼬치, 집게, 심지어는 시즐 팬까지 영업 도중 틈새에 빠진 것들을 꺼내려 낑낑대고 있었다.

보통 매년 7월이면 열흘 정도 문을 닫고 페인트와 타일을 손보고 재정비할 여윳돈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정도의 수입을 따로 떼어두는 일도,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대청소에 비용을 지불해가며 전문 업체를 부르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도 점점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영업이 끝난 후 남아서 직접 대청소를 했다. 터진 계란 노른자가 작업복과 내 옷을 뚫고 속살까지 스며들고 머리에 떡이 지고 안경에 말라붙었다. 순간 충격이 찾아왔다. 늘 힘들긴 했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어진 거지?

문을 닫고 2주가 지났지만 애슐리는 아직도 실업급여를 신청하려 애쓰고 있었고 나는 권유받은 대출을 온라인으로 신청하려 했으나 자동완성 기능의 덫에 걸려 세 번 실패했다. 간단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은 생각보다 어렵고 만만치 않았다. 아무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 터였다. 난 매일 텅 빈 가게로 출근해 엔트로피를 줄여보려고 애썼다. 전구에는 불이 나가 있었고, 작은 냉동고는 전원을 뽑고 재가동시켜야 했다. 뉴욕주 노동청의 실업급여 통지를 포함한 우편 열한 통이 도착했다. 다음 주에는 다섯 통, 또 그다음 주에는 여섯 통이 왔다.

금방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마이너스 통장은 장장 일주일을 전화통에 매달리고서 3월 25일이 되어서야 신청할 수 있었고, 일주일 후인 4월 1일 거절당했다. ”사업 소득과 개인 현금 흐름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은행 상담사의 설명에 난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웃었다. 모든 길이 오르막 같았다. 문 닫은 지 21일이 지났지만 애슐리는 아직도 실업급여 신청을 못했다. 쏟아지는 문의전화를 처리하기 위해 마련된 새 시스템에서는 성씨의 첫 글자에 따라 요일을 나누어 접수를 받는다고 했다. 애슐리는 목요일에 신청할 수 있었는데 만약 그날도 실패하면 뉴욕의 M씨들에게 배정된 날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려야 했다.

중소기업부에서 내준다는 저금리 재난 대출 링크가 돌았지만 뉴욕시는 해당 지역 목록에 없었다. 이상하지 않느냐고 회계사에게 이메일로 물어보자 그녀는 냉소적인 이모티콘과 함께 “업데이트 될 거예요.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렇죠, 뭐. 세금 걷어갈 때만 빠르지.”라고 답장했다. 제임스 비어드 재단에서는 최대 15,0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근사한 계획을 내놓았지만 3월 30일부터 닷새간 예정했던 접수는 신청이 쇄도해 몇 시간 만에 마감됐다.

집에 있던 애슐리가 우리 강아지가 다리를 심하게 전다고 문자를 보냈다. 갑자기 병원 갈 일이 생기는 건 가장 진땀 나는 시나리오였다. 냉동고의 음식과 한도가 13,000달러인 신용카드가 있으니 몇 달은 버틸 수 있겠지만 갑자기 누가 다쳐서 입원이라도 하면 병원비는 어쩐다? 우린 둘 다 보험이 없었다. 아이들은 친부의 보험에 들어 있지만 우리 둘에겐 안전망이 없었다. 셰프들 사이에는 의학적 (그리고 수의학적) 비상상황 대처법에 대한 농담 — 라텍스 장갑과 날카로운 칼,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한 스테인리스 조리대를 이용한 — 이 백 가지는 넘게 있다. 하지만 막상 비상상황이 닥치자 유머 감각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내 메일함은 이제서야 뉴욕 외식업계의 피해 범주를 이해하기 시작한 전국 동료들과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안부 메일로 터져나갈 듯했다. 동료 셰프와 식당 주인들은 식당 노동자와 식자재 공급처, 농가를 위해 긴급하게 모임을 만들고 청원을 돌려 연합하기 시작했다. 설문을 하고 의원실에 전화를 돌리고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지지 요청을 받은 지원금 법안은 국회에 상정되었지만 거대 체인과 프랜차이즈에게는 꽤나 넉넉한 지원이 약속된 반면 희한하게도 소규모 자영 식당들은 빠져 있었다. 다른 옵션인 고용 유지 지원금은 알아보니 해고한 직원들을 6월 말까지 재고용할 경우에만 지원금 상환을 면제해주게 되어 있었다. 코로나19 사망자가 아직도 늘어만 가고 강제 영업 중단 명령은 그대로인데 도대체 어떻게 재고용을 하란 말인가? 게다가 대출금을 진짜 필요한 곳에, 예를 들면 당분간의 임대료 납부와 날 괴롭히는 사무실 책상의 청구서 더미를 해결하는 데 쓸 수도 없었다.

코너에 몰린 것만 같던 바로 그때, 전에 프룬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동료들의 걱정 담긴 이메일이 도착했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이용해서 후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내겐 걸림돌이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내 존엄성 말이다. 새로운 차원의 괴로움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며칠간 고뇌했다. 뉴욕의 식당 종업원들을 위한 펀딩은 이미 여럿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이 유행에 올라타는 상상을 하니 적선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 싫다는 자존심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인기 콘테스트나 누가 인맥이 더 넓은가 겨루는 서바이벌 게임처럼 느껴져 도무지 응할 수가 없었다. 만약 프룬의 펀딩은 대성공인데 시크교인들이 운영하는 펀잡 식료품점이나 아랫골목 델리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곤혹스러울 테고, 반대로 펀딩 달성에 실패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후원금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지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모두 똑같이 나누어야 하나? 직원 한 명은 스물 한 살이지만 맨해튼에 자가를 소유하고 있고, 한 명은 실업 상태인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브롱크스 월셋집에 사는데? 결국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제안을 거절했다. 지속적으로 직원들의 상태를 확인한바 아직까지는 다들 무사한 듯했다.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이 시국에 내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건 나에겐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송아지 췌장 요리와 파마산 오믈렛이 지금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경제적 관점에서도 프룬의 존재는 의미 있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스트 빌리지는 물론 도시 전역에 프룬 같은, 심지어는 더 나은 식당이 수두룩하고 그중 몇 곳은 요리사나 서버, 바텐더뿐만이 아니라 인사 관리자부터 요리책 대필 작가까지 100명도 넘는 종업원을 고용한다.

“산업”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거나 미국 GDP의 2퍼센트에 일조한다거나 1,200만 미국 노동 인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구제해야 한다며 내 식당의 가치를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은행, 보험사, 로비스트와 입법자들에게는 오로지 이런 논리만이 통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다른 어떤 대안적 차원의 경제에서 의미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마치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옷감 전체가 풀어질 수도 있는 씨실처럼 말이다.

모두가 레스토랑 업계는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적어도 일부는 사실일 테다. 모두가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고, 전부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레스토랑이 살아남을지, 이유는 무엇일지가 지난 몇 주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존폐를 가르는 요소가 무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게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나에게 의지만 있다면 이건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확신하는 건 망상일까? 나는 갚아야 할 투자금도 없고, 거래처들은 나를 신뢰하고, 만약 임대조합이 나를 쫓아낸다면 대체할 세입자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아주 극소수만 예전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란 걸 안다. 사실 꼭 나쁜 일 같지만은 않다. 내 친구, 셰프 알렉스 라이지 말대로 이건 바로잡을 기회일 수도 있다.

레스토랑 업계가 지속적인 비용 상승에도 어떻게 운영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는 지난 몇 년간 누적되어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숨겨져 있던 위태로움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것도 꽤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지난 5~6년의 상황은 특히 걱정스러웠다. 레스토랑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업 중단은 건강보험이 없는데 갑자기 치과 치료나 맹장 수술을 받게 된 거나 다름없다. 가장 약하고 취약한 곳부터 먼저 없어질 테지만, 그게 우리 중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프룬 개점 이후 이스트 빌리지가 겪은 상전벽해는 레스토랑 씬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한다. 우리 가게 입구에서 10블록 거리 내에는 러스&도터스나 카츠네 델리 같은 100년도 넘은 노포들이 있다. 허름하지만 맛있는 팔라펠 가게, 버블티와 덤플링 가게, 마이애미에도 지점이 있는 스테이크하우스도 있다.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스시 집과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오마카세 스시야, 일본 가정식과 우동 전문점과 소바 가게도 있다. 경제정의 실현을 목표로 한, 여성이 소유하고 여성이 운영하는, 팁 제도 없는 식당도 있다. 두 애비뉴 건너에는 푸드 네트워크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셰프 바비 플레이의 125석짜리 레스토랑도 있다. 세 블록마다 ‘농장에서 테이블까지’를 콘셉트로 내건 가게가 있고, 제임스 비어드 상을 받은 곳도 몇 군데, 후보에 오른 가게는 그보다 몇 곳 더 있으며 오픈한 지 몇 년 안 된 ‘마담 보’라는 끝내주는 베트남 식당을 포함해 <뉴욕 타임스>에서 별을 한두 개 받은 가게들도 있다. 전국의 입맛을 평범한 육수에서 ‘브로도’라는 본인 브랜드로 바꾸어놓은 셰프 마르코 카노라는 요리책도 여럿 내고 방송 출연도 할 만큼 했지만 아직도 본인의 유일한 레스토랑인 허스를 1번가에서 17년째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블록마다 이름도 기억하기 전에 레스토랑들이 없어지는 곳들이 늘어만 갔다. 코로나19가 뉴욕 레스토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어느 죽음이 바이러스 때문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차피 개점 16개월이 지나기 전에 자금이나 경험 부족으로 문을 닫을 운명이었을까? 레스토랑의 부고란을 살펴보면서, 혹시 그저 지친 베테랑 셰프가 지난 몇 주간 내가 그럴 뻔했듯이 오랫동안 불타고 있던 건물 뒷문으로 조용히 걸어 나오기로 한 것은 아닌지 분간할 수 있을까?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식당 주인들은 이상할 만큼 비밀스럽게 행동하며 서로에게 거의 반사적으로 허세를 부렸다. “요즘 장사 잘돼요?” 하는 질문에는 언제나 “아유, 그럼요. 이번 분기 매출이 역대 최고예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바로 그들이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길거리로 뛰쳐나가더니 여지껏 겨우 손익분기를 넘기면서 운영해왔다고 고백한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유명 셰프들, 제국을 운영하던 사업가들, 지갑이 두둑한 투자자를 뒷배로 필요하면 언제든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도 태세를 180도 바꾸어 본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만천하에 장부를 펼쳐보이며 조목조목 까발리고 있다. 여지껏 아닌 척 부인해오던 의심을 확증하는 우울한 증언들이 쏟아진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이나 지금이나 걱정하는 내용은 여전히 같다. 레스토랑 업계가 지금처럼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 팁 받는 종업원들은 시급 45달러를 버는데 라인쿡 시급을 15달러 줄 수는 없다. 한 달 임대료가 18,000달러, 인건비는 30,000달러에 달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허름한” 술집에서 맥주를 3달러에 팔 수는 없다. 10달러는 받아야 수지가 맞는다. 찢어진 차양 수리비를 충당하기 위해 계속 소테 코너에 호스로 물을 쏘아가며 대청소를 직접 할 수는 없다. 프룬이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건 내가 이스트 빌리지에 30년 넘게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로 이사 온 건 450달러로 월셋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프룬을 열었을 때는 지금은 강철과 유리로 된 마천루가 있는 자리에 있던 건물 옥상에서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에 일어났다. 지금은 15평도 안 되는 원룸 월세가 3,810달러에 달한다.

문을 닫던 날 브런치 영업하느냐고 전화한 여자도 아마 그런 곳에 살 테다. 시간에 상관없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우버를 부르고, 2주마다 젤 네일 시술을 받고, 어디서 상을 받았다는 태국 음식을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이 시려워 오븐 장갑을 낀 배달원이 눈발을 뚫고 문앞까지 가져다주는 데 익숙할 테다. 하지만 내가 블러디 메리 가격을 28달러로 매기면 분개할 테지.

지난 10년간 친절하고 친근했던 동네 식당이 통제 불가능한 거대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놀라움과 함께 목도했다. 내가 속해 일하는 동안 이 외식 업계는 점점 이상하고 희한해졌다. ‘웨이터’는 ‘서버’, ‘레스토랑 사업’은 ‘서비스 산업’, ‘손님’은 ‘고객’, 내 ‘색깔’이라 불리던 것은 ‘브랜드’가 되었고, 재능을 나누고 주변을 돌보기 위해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조차 ‘수익화’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의 일 자체 — 맛있고 흥미로운 음식을 만들고 깨끗이 치우는 것 — 는 여전히 새롭고 정직한 일처럼 느껴지고, 늘 만족스럽다. 프룬의 소중한 단골들과 프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소매업이나 서비스업에 한번도 종사해본 적이 없는 이 도시의 새로운 주민들 때문인지, 미식을 숭배하는 거만한 푸디들 때문인지, 아니면 레스토랑 업계에 기생하는 업자들 — 블로거, 에이전트, ‘인플루언서’, 브랜드 매니저, ‘인스타’ 유명세를 만들어주겠다는 퍼스널 어시스턴트들, 푸드&와인 축제, 전혀 준비되지 않은 깜찍한 의견들을 내달라고 정기적으로 초청받는 패널 자리들 —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차고 넘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 번외편에서 존경하는 셰프가 미식축구공 모양의 베이킹 팬에 기성 시나몬번 반죽을 쑤셔넣고 레이스 패턴으로 프로스팅을 짜얹는 꼴로 날 경악하게 하는, 몇 시즌째인지 모를 푸드 네트워크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이시여, 브런치, 브런치! 팬케이크마다, 블러디 메리 한 잔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겠다고 꺼내드는 핸드폰들. 들어와서는 말 한 마디 없이 선글라스도 안 벗고 우리 홀 담당한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남자. (두 명 자리 달라는 뜻이다.) 일요일 오후에 에그 베네딕트를 먹다 갑자기 찾아올 불안 장애에 대비한 심신 보조 동물이라며 무릎에 앉힌 품종견들. 몇 달 후가 되었건 다시 문을 여는 그날이 오면 영업 중단 첫날 브런치 문의를 한 그 여자가 다시 전화를 걸었으면 좋겠다. 기쁨과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게 말이다. 아니오, 브런치 안 합니다. 더 이상 브런치는 없어요.

뉴욕 전역의 수 백, 전국의 수 천 명의 셰프들처럼 나 역시 이 질문에 직면해 있다. 만약 우리의 레스토랑을, 커리어를, 삶을 되찾게 된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누구 말을 따라야 할지,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모두가 조언한다. 포장 판매를 시작하세요! 기프트 카드를 팔아요!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세요! 소셜 미디어에 존재감을 드러내야 해요! 식재료업으로 업종을 전환해요! 가격을 올려야 해요. 비아 카로타에서는 농어 요리를 56달러에 팔던데요!

몇 날 며칠, 몇 주의 긴 자택 연금과 격리 기간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야 하나? 그게 프룬이 나아가야 할, 되어야 할 모습인가?

저녁 내내 배달 대행 주문 스크린에 뜨는 주문서를 보면서 설레어하는 내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불쌍한 배달원이 무사히 잘 배달해주길 바라며 어두운 바깥으로 음식을 담아 보낼 포장 박스를 스케치하며 즐거워하는 내 모습은 그리기 어렵다. 그저 앱으로 주문해 받아서 먹고 말 음식을 만들기 위해 메뉴와 칵테일을 궁리하고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고심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프룬을 연 건 훌륭하지만 적당한 가격의 와인과 완벽하게 조리된 깔끔한 양갈비찜을 앞에 두고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난 최선을 다해 그 이상을 유지해왔다. 만약 이런 곳이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면, 그 공간은, 그리고 우리는 멸종되는 것이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문이 영원히 닫힌 것만 같은 이 시간에도 난 여전히 꿈꾼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처럼 아직 열쇠도 없는 식당에 대해 공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엔 이미 내 것인, 임대 기간이 아직 10년은 남은 문 닫힌 가게 안에 가만히 앉아 고요히 생각한다. 창문에 신문지를 붙인, 깨끗하고 텅 빈 식당 안의 나무 의자에 앉아 냉장고가 웅웅대는 소리, 컴프레서가 주기적으로 꺼지고 켜지는 소리, 지하실의 제빙기에서 보냉통으로 얼음 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걸 들으며 매일 몇 시간을 보낸다. 가늘고 푸른 전선으로 내 몸과 연결된 것처럼. 가끔은 테이블을 재배치한다. 무슨 이유인지 2인용 테이블이 필요없을 것만 같다. 2인용 테이블을 없앤다고? 밸런타인 데이는?

지속된 거리두기에 20년간 손님과 음식을 겨우겨우 욱여넣어온 가로세로 60센티미터짜리 작은 테이블이 갑자기 꼴보기 싫어진 것도 당연하다. 원형 테이블, 큰 테이블, 6인석, 8인석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정 전에 귀가하는 이른 저녁 식사, 프랑스식 문으로 비추는 햇빛과 함께하는 여유롭고 긴 일요일 점심 식사를 내고 싶다. 오랜 단골들이 주방을 자유로이 드나들면 냄비 뚜껑을 열어 오늘의 메뉴를 보여주고 싶다. 하릴없는 요 몇 주 만드는 법을 익힌 페타치즈에 다시 열 날을 기다리며 지하실에 말려둔 소시송 몇 점을 곁들여 테이블로 가져다주고, 차가운 글래스에 늘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담아내는 완벽한 비율의 베스퍼를 만들기 위해 그렉이 얼음을 흔드는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프룬의 문을 닫은 건 처음이 아니다. 정부의 도움 없이도 프룬은 9/11과 대정전, 허리케인 샌디, 금융위기, 몇 달에 걸친 뉴욕 수도관 교체, 온라인 예약 시스템(프룬 예약은 아직도 전화로 해야 합니다. 여전히 종이랑 연필로 예약을 받는다고요!)을 이겨냈다. 편리 우선주의의 독재와 캐비아, 심리스, 그럽헙의 침략을 이겨냈다. 그러니 나는 내 사랑스러운 가게가 얕은 숨을 쉬며 잠시 쉬도록, 동면하도록 두려고 한다. 고지서들은 무시하고 말이다. 푹 쉬고 새로이 태어났을 때, 더 이상 프룬을 알아보지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이 도시에서 프룬이 어떤 모습일지, 보려고 한다.

원문 Gabrielle Hamilton, “My Restaurant Was My Life for 20 Years. Does the World Need It Anymore?” The New York Times



archive/a202306010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3/05/31 23:42 저자 clockoon